이슬람 제국의 이프리키야 정복

이슬람 제국의 이프리키야(아프리카를 아랍어화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알제리 북동부와 튀니지, 트리폴리타니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일컫던 말) 정복은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로마 세계 서방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걸출한 신학자를 배출하며 로마에 버금가는 제국 서방의 기독교 중심지였던 지역이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명권에 편입되는 비가역적인 변화를 겪게 된 계기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 지역을 유럽과 하나의 문명권으로 이어주는 다리였던 지중해는 상이한 두 문명권 간의 대결과 교류의 장으로 바뀌었다. 이프리키야는 또한 이슬람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서아프리카로 확산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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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에서 붉게 표시된 지역(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이 곧 이프리키야라고 보면 되겠다.


이슬람 제국의 이프리키야 정복은 대체로 이집트 정복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이슬람 제국의 장군인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643년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며 이집트 정복을 완수하였다. 그의 다음 목표는 이집트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그 주변 지역 역시 정복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서쪽으로 보낸 군대는 이집트로 귀환한 645년이 되기 전에 바르카를 비롯한 키레나이카의 해안 도시와 오에아, 렙티스 마그나, 사브라타와 같은 트리폴리타니아의 해안 도시들, 그리고 오늘날의 리비아 내륙을 정복하였다. 머지않은 647년, 당시 아므르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던 압달라 이븐 아비 사르는 647년 2만 명의 아랍 기병대로 이슬람 최초의 이프리키야 침공을 단행하였다.

우마이야 조의 기병. 맨 오른쪽은 우마이야 조 이집트의 기병으로, 이들과 비슷한 무장의 전사들이 이프리키야 침공군의 주력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이슬람 제국의 위협이 다가오는 가운데 비잔틴령 아프리카 속주는 칼케돈파와 단의론파의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의 군대 앞에 무기력하게 후퇴하며 이집트까지 점령당하자, 당시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플라비우스 그레고리우스는 646년 단의론을 기치로 내걸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콘스탄스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이슬람 침공군에 대항해 수페툴라(오늘날 스베이틀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며 반란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레고리우스의 전사 이후 다시 콘스탄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총독 자리를 이어받은 겐나디우스 2세는 침공군에게 300 탈렌트를 지불하여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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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프 시대의 정복지.

그러나 이와 같이 이슬람 군대의 서방 원정은 본질적으로 이집트 영유의 확고화와 약탈이 목표였으며, 이프리키야의 정복 의도는 없었다. 거기다가 656년 이집트를 포함한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과 제 3대 정통 칼리프인 우스만의 암살, 그리고 661년까지 이어진 내전(제 1차 피트나)로 인해 이슬람 제국의 정복은 얼마간 멈추었다.

비잔틴 제국은 이 좋은 시기에 아프리카의 방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 아나톨리아를 비롯한 동부 전선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내분을 꽤나 활용했던 콘스탄스 2세였지만, 아프리카의 방어에는 사실상 기여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의 반란과 전사 이후 아프리카는 칼케돈 파 주교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겐나디우스가 통치하는 실질적인 자치 왕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왕국은 단지 비잔틴 중앙 정부와 이슬람 제국 양측에 공물을 제공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고, 특히 663년에 시라쿠사를 방문한 콘스탄스 2세가 공물 납부량을 크게 증가시키면서 오히려 비잔틴 제국 중앙 정부와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겐나디우스는 공물 납부를 거부했다가 반란으로 쫓겨나 우마이야 조에 투항, 칼리프의 허락을 받아 아프리카를 거꾸로 침공할 뻔 했으나, 그가 66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병사함으로써 이는 무위로 돌아갔다.

'우크바의 모스크'라고도 불리는 카이라완의 대() 모스크. 9세기 아글라브 조 시대에 지어졌다. 카이라완은 경주와 비슷하게 도시의 문화유산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프리카 속주의 이와 같은 내부 사정은 내전 이후 다시 체제를 정비한 우마이야 조 초대 칼리프인 무아위야 1세에게 좋은 기회로 비쳐졌고, 666년 그의 심복인 무아위야 이븐 후다이지는 군대를 이끌고 다시금 이프리키야를 침공하였다. 무아위야는 아프리카 속주의 남부 일대인 비자케나를 점령한 뒤 667년 이집트로 귀환하였다. 670년 이프리키야의 통치자로 임명된 우크바 이븐 나피는 같은 해 이프리키야에 신도시 카이라완을 세우고 이를 이프리키야의 수도이자 약탈과 새로운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는 해안 지역이 비잔틴 제국의 해군과 해적들로부터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특별히 내륙에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카이라완의 건설은 지금까지 이슬람 제국 내에서 이집트의 변방 정도로 취급받았던 이프리키야가 이집트와는 다른 하나의 지역 단위로 거듭났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이프리키야는 705년까지 이집트 총독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다.

우크바와 그의 일시적 후임이자 라이벌이었던 아부 무하지르 디나르는 봉 곶(카르타고 동쪽에 있는 반도)을 비롯한 비잔틴령 아프리카의 정복을 이어갔다. 비잔틴 제국의 방어는 이슬람 군대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으며, 본격적인 저항은 베르베르인 부족과 왕국이 제공했다. (물론 이슬람 정복지에 살던 원주민 베르베르 부족은 - 주로 유목민 - 이슬람 제국의 가혹한 지배에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않았거나 정복에 동참하였으므로 일반화는 피해야 할 것이다.) 서로마 제국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455년 암살된 이래,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내륙은 독립적인 베르베르 부족과 왕국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이들 중 특히 누미디아 일대에 위치했던 부족은 상당한 수준으로 로마화, 도시화, 정주화된 상태에 있으면서 반달 왕국, 그리고 뒤이은 비잔틴 제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비잔틴 영토로 침공해올 때 이들은 중립을 지켰지만, 자신들에 대한 침공에 있어서는 기독교라는 공통 분모로 묶인 비잔틴 제국과 동맹하여 강력하게 저항했다.

저항의 주역은  카실라(또는 쿠사일라)가 이끄는 아우레스 산맥의 아우라바 부족이었다. 카실라는 처음에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우마이야 조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683년 비스크라 인근에서 벌어진 타후다 전투에서 무려 모로코 남부까지 원정하고 돌아오는 우크바의 군대를 급습하여 격파하고 우크바와 아부 무자히르를 모두 전사시켰다.

로마 시대 아프리카에 관한 지도 위에 비스크라(Vescera), 스베이틀라(Sufetula), 카이라완(Kairouan), 카르타고(Carthago), 베자(Beja)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더불어 비자케나의 중심 도시였던 수스(Hadrumetum)와 아우라바(Awraba) 부족의 위치 역시 표시하였다. 표시는 직접 한 거라 부정확할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길.


674년에서 678년까지 장기간 이어진 콘스탄티노플 공략의 실패, 그리고 같은 해 메카에서 일어난 압달라 이븐 주바이르의 반란(제 2차 피트나)와 더불어 타후다 전투의 패배는 우마이야 조의 이프리키야 정복에 얼마간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 역시 동부 전선에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에 대응하느라 아프리카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조건은 카실라가 카이라완을 비롯한 이프리키야 일대를 점령하고 많은 베르베르 부족을 휘하에 둘 수 있게 하였다. 카실라는 이슬람교도로 행동하고 카이라완에 남아 있던 우마이야 군의 잔당을 품위에 맞게 대접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비잔틴 제국 역시 비자케나와 누미디아에서 약간의 영토를 회복하고 카실라의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내전이 칼리프에게 유리하게 기울어 여유가 생긴 우마이야 조는 689년 다시 우크바의 부하였던 주하이르 이븐 카이스가 이끄는 원정대를 보내 690년 카실라를 전사시켜 베르베르인의 연맹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라비아의 반란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력이 본국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우마이야 조는 방비가 허술했던 키레나이카의 해안 도시인 바르카를 비잔틴 해군에게 뺐기고 말았다. 이는 이집트에서 시작되는 보급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으므로 주하이르는 바르카를 공격하여 탈환하고자 했으나 실패, 전사하고 만다.

마침내 내전이 실질적으로 종료되고 난 695년에 이르러서야 우마이야 조는 하산 이븐 알 누만 알 가사니의 지휘 하에 이프리키아에 대한 마지막이자 4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을 감행한다. 알 누만은 곧장 카르타고로 진격하여 점령했으며, 비잔틴 고위층은 시칠리아와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쳤다. 비잔틴 잔당은 비제르테(지도에서 맨 위에 Hippo Diarrhytus)로 도망쳤다 그곳도 이슬람 군대에게 점령당하자 오늘날 베자 인근까지, 그들의 베르베르인 동맹군은 안나바(지도에서 Hippo Regius)까지 후퇴하였다.

반면, 아우레스 산맥에 살던 게라와 부족의 여왕인 알 카히나는 696년과 697년 사이 아우레스 산맥으로 진군하던 이슬람 군대를 테베스테(지도에서 Aures Mountains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 부근에서 격파했다. 알 누만은 뒤이어 가프사(지도에서 남쪽에 Capsa)에서도 베르베르인에게 패배한 이후 키레나이카로 후퇴, 699년까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책에서는 알 카히나의 본거지는 베자이아(지도에서 해안가 맨 서쪽의 Saldae)였고, 알 누민의 군대가 카르타고 점령 후 북부 해안을 따라 진군하다 알 카히나에게 저지당했다고도 한다.) 그 사이 697년에 비잔틴 제국 역시 카르타고를 탈환하는 등, 전세는 알 누민에게 불리한 듯 했다.

당시 비잔틴 해군의 주력함이었던 드로몬. 그러나 우수한 해군력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은 아프리카 속주를 방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알 카히나는 훗날 올 우마이야 조의 재침공을 저지하고자 청야전술을 택했고, 이는 오히려 알 카히나의 왕국 내에 혼란을 불러왔다. 알 누민은 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다시 이프리키야를 침공하여 카르타고로 속행,재점령에 성공했다. 카르타고보다 살짝 내륙에 튀니지를 건설하고 그 외항이 될 라 굴레트 및 둘을 잇는 운하의 건설을 지시한 사람이 바로 알 누만이라고 한다. 알 누만은 이집트에서 조선공을 불러와 함대를 건설하여 이프리키야 근해에서는 유지되었던 비잔틴 제국의 해상 지배권을 뺏어오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자 비잔틴 해군은 해안 도시에서 피난민들을 수송해 시칠리아,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등지로 수송하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즉, 비잔틴 제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때때로 빼앗긴 해안 도시나 요새를 되찾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아프리카 속주를 아랍 기병대의 약탈과 점령에 무방비로 노출시켰다고 종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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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 아프리카 내륙의 식민 도시였던 팀가드. 로마인이 물러난 후 5세기에 베르베르인은 로마인이 다시는 올 생각을 품지 않도록 이 도시를 파괴했다고 한다. 팀가드는 비잔틴 시대에 회복되긴 하였으나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에는 무리였고, 이슬람의 침공 이후 8세기에 이르면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비잔틴 제국은 일견 중요한 속주로 보이는 아프리카의 방어에 무관심했던 것일까? 물론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더 가까운 곳에서 더 강력한 적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겠으나, 한 가지 주장은 5세기 이후 서지중해의 무역로와 시장이 붕괴됨에 따라 아프리카의 경제가 침체를 면치 못했고, 비잔틴 제국의 통치는 이를 회복시키기에 역부족이었으며, 비잔틴 제국 본국을 포함한 제국 동부는 아프리카를 경제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프리키야에서는 이슬람 제국 침공 이전, 비잔틴 지배 초기인 6세기 후반부터, 트리폴리타니아에서는 그보다도 훨씬 이른 5세기 말부터 도시와 방어 거점이 버려지거나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농경이 축소되는 반면 목축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고 한다. 또,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던 올리브유와 자기는 5, 6세기에 양과 지리적 분포상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이런 추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대외 무역의 쇠퇴를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있다. 압달라 이븐 아비 사드가 수페툴라의 지주들에게 어디서 황금을 얻는가를 물었을 때 올리브유를 팔아서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7세기 말까지도 마르세유, 로마 등에서는 아프리카산 올리브유 암포라가 다량 발견되며, 서부 지중해 다른 지역에서 금과 그에 따른 화폐가 희귀해지는 와중에도 아프리카는 예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학자들은 아프리카와 동로마, 나아가 사산 조 일대에서 6, 7세기는 경제적 쇠락이 아니라 변화의 시기였고, 이슬람 정복 직후의 지역 경제 역시 그런 장기적 추세의 연장으로 본다. 5, 6세기의 경제적 쇠퇴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는 동로마의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다. 

700년에는 알 카히나를 (다른 책에 따르면 가베스 - 위 지도에서 튀니지 해안가 중 아래에서 짤린 곳 바로 남쪽 - 에서) 격파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알 카히나는 아랍 기병대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툽나 -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위 지도에서 왼쪽에 bunae라고 이름이 짤린 Tubunae인 듯 - 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마침내 전사했다고 나온다.) 알 카히나가 지휘하던 군대 중 일부는 알 누민의 군대에 흡수되었으며, 알 카히나의 아들들이 지휘했던 이들 베르베르 부대는 711년 안달루시아 공략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베르베르인은 이슬람 제국과 군사적으로 대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력이 통일되지 못한 탓에 지속적인 전쟁을 이어나갈 능력이 없었고, 이슬람 제국의 반복적인 침공 앞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703년 알 누만의 후임으로 온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이프리키야에 점점히 남아 있던 저항 세력마저 일소함으로써 우마이야 조는 적어도 705년에 이르면 이프리키야 전역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한다. 705년과 710년에 이르는 기간에 그는 이프리키야와 탕헤르 사이 일대를 공략하였고, 711년에는 7000 명의 베르베르인 기병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하여 60여년간 이어진 이슬람 세력의 이프리키야 정복은 막을 내렸고, 제 3차 포에니 전쟁 이래 반달 왕국 시기를 제외하고 7세기 반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지배,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로부터만 따져도 5세기에 이르는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문명은 종말을 고하였다. 



하지만 역사에서 완전한 단절은 없는 법이므로 이슬람 정복 이후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도록 하자. 705년 이프리키야는 카이라완을 수도로 하는 독립된 윌라야(이슬람 국가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우마이야 조의 판도가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이름으로써 이프리키야 윌라야는 이론상으로는 이프리키야뿐만 아니라 마그레브 전역과 안달루시아를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8세기가 지나기 전에 모로코와 알제리, 그리고 제리드(튀니지 남부 건조 지대)는 카이라완의 지배권을 벗어나게 된다.

8세기 초중반의 우마이야 조 왈리(칼리프를 대신하여 윌라야를 통치하는 사람)는 윌라야의 문제에 관련한 전권을 쥐고 있었으며, 출신 신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대체로 평화로운 가운데 소박함을 지향하였다. 스베이틀라, 테베스테, 카르타고와 같은 고대 도시는 쇠퇴하였지만 카이라완과 튀니스와 같은 새로운 군사 거점 겸 도시의 성장이 이를 상쇄하였다. 이프리키야는 이슬람 국가의 전형적인 정부 양식과 세법을 따르는 가운데, 처음에는 행정에서 비잔틴 제국 시절의 관료와 라틴어, 화폐(데나리우스)가 계속 사용되었으나 점차 이슬람화(719년 데나리우스->디나르)가 진행되었다.

우마이야 조의 정복 이후 대부분 상류층과 성직자로 이루어진 기독교인의 피난 행렬이 지중해를 건너 이어졌지만, 나머지 원주민 -  비잔틴 계열 로마인(룸) 혹은 로마/기독교화된 베르베르인(아파리카) - 이 계속 남아 기독교를 신봉, 성서의 사람들(딤미)로서의 법적 지위를 얻었다. 정복과 함께 이프리키야로 이주한 아랍인의 전체 숫자는 5만 명 미만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도시에 집중되어 있어서 아랍화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한 학자는 무슬림이 인구의 다수가 된 것은 9세기, 절다 대수가 된 것은 10세기의 일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원주민 중 룸 및 유대인은 아랍화에 특히 저항이 컸던 반면에, 도시에 사는 로마화된 베르베르인(아파리카)들은 비록 기독교를 신봉하였지만 아랍인들 수하에서 일하면서 아랍의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반면에, 시골의 베르베르인들 - 인구의 대다수 - 은 아랍인에게 외부인으로 취급받으며 박해를 받았고, 이는 8세기 중엽 대대적으로 발생한 반란의 도화선이 된다.

기독교는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수적으로나 크게 축소되긴 했지만, 지중해 건너편의 카톨릭 교회와의 긴밀한 교류는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이슬람 정복의 상징인 카이라완에서조차 11세기 중엽까지 주교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1세기를 거치면서 남아있던 소수의 주교구들이 차례로 폐지되며 마지막 남은 기독교인은 잠시 튀니지 해안 지방을 점령했던 노르만인들과 함께 1160년 지중해 너머로 떠나게 된다.

한편, 8세기 초의 이프리키야 경제는 이전의 하락세가 중단되고 정체 혹은 완만한 회복의 길을 걸었다. 특히 이프리키야 내에서는 전쟁이 종식됨으로써 지역 내 및 동방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 광업이 증가하였다. 또, 왈리들은 새로운 도시에서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급수 시설이 부족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슬람 정복이 이프리키야 쇠퇴의 주범이라는 인식은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이슬람 정복을 통해서 추락으로부터 구원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시기에 들어 노예무역이 중요한 지역 산업으로 자리잡았다는 것 역시 특징이다.

건축에 있어서도 역시 현지의 비잔틴 양식과 동방에서 새로 건너온 이슬람 양식의 혼합적인 성격을 띠는 건물이 건설되었다. 불행히도 기둥과 자재를 손쉽게 구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건물들이 다수 훼손되기도 했다.

카이라완이 지역의 종교적 중심지로 기능하긴 했지만, 아직 철학과 신학, 이슬람법, 아랍어 문학에 있어서는 별다른 심화나 진전이 없었고, 동방으로부터의 지적, 종교적 자극을 기다려야 했다.



자료는 <Tunisia since the Arab Conquest: The Saga of a Westernized Muslim State>를 주로 참조하였고(즉 베낌), 중간중간에 위키피디아랑 <Staying Roman:Conquest and Identity in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439–700>, <North Africa: A History from the Meditteranean Shore to the Sahara>, <The Great Arab Conquests: How the Spread of Islam Changed the World We Live in>을 참고. 자료마다 연도나 아랍어 표기가 일정하지 않았는데, 되도록이면 <Tunisia...>를 기준으로 함. 그 밖에 "Specialized Production and Exchange" in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XIV> 및 <Agrarian Change in Late Antiquity: Gold, Labour, and Aristocratic Dominance> 일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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